『파과』는 작가 구병모가 쓴 단편 소설로, 고령의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심리 서사 소설입니다.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암살극이 아닌, 삶과 죽음, 고립과 자아, 그리고 여성의 존재성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폭력적이면서도 고요한 문장 속에서 서늘한 긴장감과 깊은 통찰이 공존하는 작품입니다.
스릴러 요소와 긴장감
『파과』는 킬러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은 극도의 심리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은 은퇴를 앞둔 노년의 여성 암살자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또 한 명의 타깃을 추적합니다.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킬링 미션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녀의 감정 변화, 기억, 트라우마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긴장감은 총격이나 추격 같은 자극적인 장면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물의 내면을 천천히 들춰내며 조용히 조여오는 압박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인물 간 대사도 최소화되어 있으며, 주인공의 내면 독백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주인공의 감정선에 몰입하게 되고,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 예측하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특히, '파과'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주인공의 삶은 이미 ‘터져버린 과일’처럼 되돌릴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음을 상징합니다. 그녀가 짊어진 업보, 그리고 타깃과의 심리전은 생존과 죄책감, 기억 사이에서 계속 흔들립니다. 이 긴장감은 일반적인 액션 중심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서사적 깊이를 보여줍니다.
여성 서사의 독창성
『파과』는 보기 드문 ‘노년 여성’이 중심인 서사로, 한국 문학에서 매우 이례적인 시도를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킬러 캐릭터는 젊고 체력 넘치는 남성으로 그려지지만, 이 소설은 사회에서 쉽게 투명해지는 나이 많은 여성, 그것도 전문 암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이 인물은 단순히 여성이라는 성별을 넘어서, 나이 든 여성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감정을 극도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그녀는 외로움, 상실, 분노, 후회를 모두 품고 살아가며, 자신의 삶을 철저히 감추고 살아온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맡는 일은 타인의 생명을 끊는 일입니다. 생명을 끊으며 생존해온 인물이라는 점은 페미니즘적 시선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여성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그리고 그 가해자가 충분히 복합적인 내면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는 기존 여성 서사들이 주로 피해자나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던 것에서 벗어난, 매우 도전적인 구조입니다. 작품 속에서 보호자로 등장하는 또 다른 여성이 있듯, 이 작품은 여성들 간의 묘한 연대와 경계를 끊임없이 조명합니다. 그녀들의 대화와 침묵은 때론 감정적이고, 때론 잔혹할 정도로 이성적입니다. 『파과』는 여성을 위한 서사라기보단, 여성 안에 숨겨진 복잡성과 사회적 투영을 직시하는 소설입니다.
1인칭 시점의 심리 서술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1인칭 시점을 통해 보여주는 깊은 심리 묘사입니다. 주인공은 자신만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하고, 감정을 통제하며 독자에게 자신의 시선을 강요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마치 그녀의 뇌 속에 들어간 것처럼, 서늘하고 고립된 감정 세계를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주인공의 독백은 건조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감정 표현보다는 상황 묘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 죄책감, 인간에 대한 미묘한 애정이 스며 있습니다. 이러한 1인칭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일종의 ‘심리 감금’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주인공 외에는 거의 등장인물의 내면이 보이지 않으며, 우리는 오직 그녀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 방식은 이야기에 몰입감을 주는 동시에, 독자가 그녀의 도덕성에 질문을 품게 만드는 장치로도 작용합니다. 또한, 그녀의 서술 방식은 문장 하나하나에 무게를 부여합니다. 그녀는 필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으며, 독자는 문장 사이의 여백을 통해 의미를 추론하게 됩니다. 이는 일반적인 플롯 중심 서사와는 차별되는 지점이며, 『파과』만의 문학적 깊이를 더합니다.
『파과』는 킬러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넘어, 인간의 고립, 존재의 불안, 그리고 여성의 삶을 탐색하는 뛰어난 심리 서사 소설입니다. 1인칭 시점이 주는 집중력과 노년 여성이라는 독특한 주인공 설정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당신이 한 편의 밀도 높은 소설을 찾고 있다면, 『파과』는 분명 기억에 남을 선택이 될 것입니다.